[TL;DR]
- 나이지리아에서 버튼폰 기반 USSD 송금은 12초에 10나이라가 드는 반면, 크립토 앱은 4분에 183나이라가 들어 18배 비싸며, 사용자의 89%가 여전히 피처폰이나 저사양 안드로이드를 사용하기 때문에 앱 중심 전략은 시장 진입조차 어렵다.
- MFS 아프리카는 37개국 500개 이상의 모바일 머니 시스템을 연결하고, 글루와는 온체인 신용 기록 인프라를 구축하며, WaaS 제공 업체들은 키 관리 API를 제공하는 등 소비자 눈에 보이지 않는 B2B 인프라 레이어를 선점한 기업들이 장기적으로 시장을 지배할 것이다.
- 아프리카에서 실험되는 USSD-블록체인 연동 프로토콜, 행동 데이터 기반 신용 평가, 국경을 넘는 온체인 신용 기록 시스템은 단순히 한 지역 시장의 솔루션이 아니라 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등 전 세계 저자원 국가 40억 인구를 위한 글로벌 표준의 초안이 되고 있다.
1. 당신의 서비스가 실패하는 이유: 잘못된 전제들
1.1 스마트폰이 없어도 돈은 움직입니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돈을 보내는 가장 빠른 방법은 앱이 아닙니다. 버튼폰에서 *966#
을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누르면, 화면에 메뉴가 뜹니다. 숫자 몇 개만 더 입력하면 송금이 끝납니다. 12초가 걸립니다. 인터넷 연결도 필요 없고, 데이터 요금도 들지 않습니다. USSD라는 기술은 2G 통신망만 있으면 작동합니다.
반면 크립토 앱은 어떨까요. 앱을 다운받으려면 와이파이가 필요하고, 실행하려면 최소 4G 연결이 있어야 합니다. 거래 한 번에 15MB의 데이터를 씁니다. 로딩 중 두 번 멈추고, 같은 송금을 마치는 데 4분이 걸립니다. 사용자는 다시 그 앱을 열지 않습니다. 나이지리아 사용자의 89%는 여전히 피처폰이나 저사양 안드로이드를 씁니다. 크립토 회사들은 수백만 달러를 들여 아름다운 앱을 만들지만, 정작 사용자의 환경을 전제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기술 수준이 아닙니다. 현지 은행들은 이미 10년 전부터 버튼폰으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해왔습니다. 제니스 뱅크, 퍼스트 뱅크, 액세스 뱅크 모두 고유한 USSD 코드를 갖고 있고, 사용자들은 그 코드를 외웁니다. 전화번호를 외우듯이 말입니다. 앱을 깔 필요도, 로그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코드 하나면 계좌 잔액 조회부터 송금, 공과금 납부까지 모두 처리됩니다.
크립토 서비스가 여기서 경쟁하려면 앱 개발 능력이 아니라 인프라 전략이 필요합니다. 스마트폰 보급률이 낮고, 인터넷이 불안정한 환경에서 사용자 경험을 설계할 수 있는가. 기존 통신 인프라와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 서비스는 아무리 좋은 기술을 써도 시장에 진입조차 하지 못합니다.
1.2 데이터 요금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
나이지리아에서 데이터 1GB 가격은 약 500나이라입니다. 최저임금이 월 3만 나이라 수준이니, 1GB는 최저임금의 약 1.6%에 해당합니다. 한국으로 치면 한 달 월급이 200만 원인 사람이 데이터 3만 원을 쓰는 셈입니다. 그것도 한 달이 아니라 며칠 만에 소진됩니다. 크립토 앱 하나를 다운받고, 회원가입하고, 거래 몇 번 하면 그만큼 듭니다.
USSD는 거래 한 번에 10나이라가 듭니다. 크립토 앱은 데이터비로 133나이라, 거래 수수료까지 합치면 183나이라입니다. 18배 비쌉니다. 단순히 비용 문제만이 아닙니다. 인터넷 연결이 하루에도 몇 번씩 끊기는 환경에서, 거래가 중간에 멈추면 사용자는 돈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을 느낍니다. USSD는 그런 불안이 없습니다. 2G 통신망은 4G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거래는 즉시 처리되거나 즉시 실패합니다. 중간 상태가 없습니다.
결국 크립토 서비스가 아프리카에서 성공하려면, 데이터 소비를 최소화하거나 아예 데이터 없이 작동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번들 아프리카라는 스타트업은 한때 나이지리아에서 빠르게 성장했지만, 2023년 서비스를 종료했습니다. 앱 기반 전략으로는 기존 금융 인프라의 비용 효율성을 넘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부 크립토 기업들은 이 문제를 인식하고 USSD 통합을 시도합니다. 사용자가 버튼폰에서 특정 코드를 누르면, 백엔드에서 블록체인 거래가 실행되고, 결과만 문자로 전송되는 방식입니다. 기술적으로는 복잡하지만, 사용자 경험은 단순합니다. 이런 하이브리드 구조가 현실적인 해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구현하려면 통신사, 현지 금융기관, 블록체인 인프라 제공자가 모두 협력해야 합니다. 그 조율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1.3 앱스토어가 아니라 다이얼 코드가 인프라
스마트폰 사용자가 앱을 설치하는 경로는 명확합니다. 구글 플레이스토어나 앱스토어에서 검색하고, 다운받고, 실행합니다. 하지만 나이지리아에서는 앱스토어 접근 자체가 장벽입니다. 구글 계정을 만들려면 이메일이 필요하고, 이메일을 만들려면 인터넷이 필요합니다. 저사양 폰에서는 플레이스토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반면 USSD 코드는 유통 경로가 완전히 다릅니다. 은행은 TV 광고, 라디오, 전단지에 자신들의 코드를 박아놓습니다. *966#
을 외우라고 말입니다. 거리 곳곳에 있는 은행 에이전트들은 고객에게 직접 코드를 알려주고, 사용법을 시연합니다. 앱을 설치할 필요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쓸 수 있습니다. 이 즉시성과 접근성이 USSD의 가장 큰 강점입니다.
크립토 서비스가 이 구조를 따라가려면 단순히 기술 개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오프라인 유통망을 구축하거나, 기존 유통망과 협력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통신사 대리점이나 은행 에이전트가 크립토 서비스의 코드를 함께 알려줄 수 있도록 제휴를 맺는 방식입니다. 이는 마케팅이라기보다 유통 전략의 재설계에 가깝습니다.
일부 기업들은 기존 USSD 코드에 메뉴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진입합니다. 예를 들어, 은행의 *966#
을 누르면 송금, 잔액 조회 같은 메뉴와 함께 '크립토 거래' 항목이 나타나는 식입니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새로운 코드를 외울 필요 없이, 익숙한 인터페이스 안에서 새로운 서비스를 만납니다. 이런 접근이 진입 장벽을 낮추는 현실적 방법입니다.
1.4 "누구를 위한 기술인가"라는 질문
크립토 업계는 종종 기술 자체에 집중합니다. 더 빠른 블록체인, 더 낮은 수수료, 더 나은 지갑 인터페이스 말입니다. 하지만 나이지리아 사용자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거래가 12초 만에 끝나는가, 데이터 요금이 얼마나 드는가, 인터넷 없이도 쓸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기술의 우수성과 사용자의 필요 사이에는 간극이 있습니다.
이 간극을 메우지 못한 서비스들은 결국 시장을 떠났습니다. 번들 아프리카만이 아닙니다. 수많은 크립토 월렛, 거래소, 송금 서비스가 아프리카 시장에 진출했다가 철수했습니다. 기술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현지 환경에 맞지 않았습니다. 앱 중심 설계, 높은 데이터 소비, 복잡한 가입 절차가 모두 장애물이었습니다.
성공한 서비스들은 대부분 현지 파트너와의 협력을 통해 기존 인프라를 활용했습니다. 통신사와 제휴해 USSD를 통합하거나, 마이크로파이낸스 기관과 손잡고 오프라인 유통망을 공유했습니다. 기술을 밀어넣는 게 아니라, 이미 작동하는 시스템 안에 기술을 끼워넣는 방식입니다. 이는 기술 회사의 관점에서는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장 진입의 유일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결국 아프리카 시장에서 크립토 서비스가 성공하려면, "우리가 만든 기술을 어떻게 팔 것인가"가 아니라 "현지 사용자가 실제로 쓸 수 있는 형태는 무엇인가"부터 물어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대부분 기술 외부에 있습니다. 유통 구조, 비용 구조, 신뢰 구조를 먼저 이해해야 기술이 의미를 갖습니다.
2. 보이지 않는 전쟁: 인터페이스 레이어를 선점하라
2.1 앱이 아니라 프로토콜이 시장을 지배합니다
미국 핀테크 시장에서 플레이드라는 회사는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소비자가 직접 쓰는 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벤모, 로빈후드, 코인베이스 같은 앱들은 모두 플레이드의 API를 통해 은행 계좌와 연결됩니다. 플레이드는 금융 데이터의 통로를 장악했고, 그 위에서 수백 개의 앱이 작동합니다. 소비자는 플레이드를 보지 못하지만, 모든 거래는 플레이드를 거칩니다.
아프리카에서도 비슷한 구조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사용자 눈에 보이는 건 송금 앱, 결제 앱, 크립토 월렛입니다. 하지만 그 뒤에서 작동하는 인터페이스 레이어를 누가 소유하는가가 진짜 경쟁입니다. 국가 간 결제를 연결하는 API, 통신사와 금융기관을 묶는 프로토콜, 신용 데이터를 표준화하는 시스템 말입니다. 이 레이어를 선점한 기업이 장기적으로 시장을 지배합니다.
MFS 아프리카는 37개 아프리카 국가의 모바일 머니 시스템을 연결합니다. 케냐의 M-페사 사용자가 나이지리아의 MTN 모바일 머니 사용자에게 돈을 보낼 수 있는 이유는, MFS 아프리카가 중간에서 환율 계산, 포맷 변환, 정산을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사용자는 MFS 아프리카를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거래는 MFS 아프리카의 API 허브를 거칩니다.
이런 구조에서 B2C 앱은 교체 가능합니다. 더 좋은 UI, 더 낮은 수수료를 내세운 경쟁사가 나타나면 사용자는 쉽게 갈아탑니다. 하지만 프로토콜 레이어는 교체하기 어렵습니다. 수십 개의 파트너사와 통합되어 있고, 데이터 흐름 전체가 그 구조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앱은 경쟁하지만, 프로토콜은 표준이 됩니다.
2.2 37개국을 묶는 보이지 않는 인터페이스
아프리카는 하나의 시장이 아닙니다. 54개 국가가 각자 다른 화폐, 다른 규제, 다른 통신 인프라를 갖고 있습니다. 케냐에서 성공한 서비스가 나이지리아에서 그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언어도 다르고, 결제 습관도 다르고, 신뢰하는 기관도 다릅니다. 국경 간 송금은 기술적으로는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국의 규제와 인프라를 모두 통과해야 합니다.
MFS 아프리카 같은 기업이 하는 일은 단순히 API를 제공하는 게 아닙니다. 각국의 중앙은행, 통신사, 모바일 머니 사업자와 개별적으로 계약을 맺고, 그들의 시스템과 1:1로 연결합니다. 케냐의 사파리콤, 나이지리아의 MTN, 가나의 보다폰은 각각 다른 프로토콜을 씁니다. MFS 아프리카는 이들 사이의 번역기이자 조율자 역할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환율 계산도 실시간으로 이뤄집니다. 케냐 실링을 나이지리아 나이라로 바꾸는 환율은 시장에서 결정되지만, 실제 거래에서는 중간 수수료가 붙습니다. MFS 아프리카는 이 수수료 구조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지만, 거래가 성사될 때마다 일정 비율을 가져갑니다. 사용자는 송금 앱의 수수료만 보지만, 실제로는 여러 레이어에서 보이지 않는 비용이 발생합니다.
이런 구조를 만드는 데는 기술보다 협상력과 신뢰가 더 중요합니다. 각국 규제 기관을 설득하고, 통신사와 수익 배분 구조를 합의하고, 파트너사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해야 합니다. 이 과정은 몇 년이 걸립니다. 일단 구축되면 다른 기업이 똑같은 네트워크를 만들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먼저 구축한 기업이 사실상의 표준이 됩니다.
2.3 통신사가 은행보다 먼저 금융이 된 구조적 이유
케냐에서 M-페사는 2007년에 시작됐습니다. 사파리콤이라는 통신사가 만든 모바일 머니 서비스입니다. 은행 계좌 없이도 휴대폰만 있으면 돈을 보내고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케냐 GDP의 약 40%가 M-페사를 통해 움직입니다. 은행이 아니라 통신사가 금융 인프라의 중심이 됐습니다.
왜 은행이 아니라 통신사였을까요. 은행은 지점 수가 적고, 신분증 없는 사용자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반면 사파리콤은 전국에 수만 개의 대리점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습니다. SIM 카드를 파는 곳이 곧 현금 입출금 지점이 됐습니다. 사용자는 대리점에서 현금을 내고, 휴대폰 계좌에 잔액을 충전합니다. 송금은 휴대폰 번호만 알면 됩니다. 받는 사람은 가까운 대리점에서 현금으로 인출합니다.
이 구조에서 통신사는 신뢰할 수 있는 중간 매개자 역할을 합니다. 사용자는 은행을 신뢰하지 않지만, 통신사는 신뢰합니다. 통화를 하려면 통신사와 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그 관계는 오랫동안 지속됩니다. 은행은 일상적으로 쓸 일이 없지만, 통신사는 매일 씁니다. 그래서 통신사가 금융 서비스를 제공할 때 사용자는 더 쉽게 받아들입니다.
나이지리아에서도 MTN이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MTN은 통신사지만 금융 라이선스를 받았고, 모바일 머니 서비스를 운영합니다. 단순히 송금만이 아니라 소액 대출, 저축 상품도 제공합니다. 크립토 기업들이 이 구조와 경쟁하려면, 통신사와 협력하거나 아니면 통신사처럼 신뢰받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둘 다 쉽지 않습니다.
2.4 B2B 인프라 기업이 살아남는 이유
소비자 대상 앱들은 빠르게 성장하다가 빠르게 사라집니다. 경쟁이 치열하고, 사용자 충성도가 낮고, 수익성을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B2B 인프라 기업은 느리게 성장하지만, 한 번 자리 잡으면 오래 갑니다. 파트너사와의 계약이 장기적이고, 전환 비용이 높고, 네트워크 효과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글루와는 소비자를 직접 상대하지 않습니다. 대신 나이지리아와 가나의 마이크로파이낸스 기관, 통신사, 핀테크 기업과 협력합니다. 이들 기관이 고객에게 대출을 해줄 때, 글루와의 블록체인 인프라를 통해 신용 기록이 온체인에 남습니다. 고객은 글루와를 모르지만, 그들의 신용 데이터는 글루와의 시스템에 저장됩니다.
이 구조의 장점은 확장성과 지속성입니다. 글루와는 파트너사 한 곳만 확보하면, 그 파트너가 가진 수만 명의 고객 데이터를 자연스럽게 수집할 수 있습니다. 소비자 앱처럼 한 명씩 유치할 필요가 없습니다. 파트너사 입장에서도 글루와의 시스템을 다른 것으로 바꾸려면 기존 데이터 전체를 마이그레이션해야 하므로, 쉽게 전환하지 않습니다.
MFS 아프리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바일 머니 사업자들은 국경 간 송금 기능을 자체 개발할 수도 있지만, MFS 아프리카의 네트워크를 쓰는 게 훨씬 빠르고 저렴합니다. 이미 수십 개 국가와 연결되어 있고, 규제 문제도 해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MFS 아프리카는 플랫폼이 아니라 인프라로 작동합니다.
이런 인프라 기업들의 공통점은 소비자와 직접 접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B2B 형태로 시장의 밑그림을 그립니다. 앱보다 시스템, 사용자 인터페이스보다 생태계 구조가 이들의 작업 대상입니다. 그리고 이 구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시장 전반의 규칙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크립토 기업들이 아프리카에서 장기적으로 성공하려면, 소비자 앱이 아니라 이런 인프라 레이어를 선점해야 합니다.
WaaS(Wallet-as-a-Service)는 키 관리와 복구 시스템을 API로 제공해, 핀테크 기업들이 몇 줄의 코드만으로 지갑 기능을 추가할 수 있게 합니다. 온오프램프 제공 업체는 현지 화폐와 암호화폐 간 교환을 처리하는 인프라를 제공합니다. 나이지리아 나이라를 USDT로, 케냐 실링을 비트코인으로 바꾸는 복잡한 과정을 API 하나로 해결합니다.
노드 인프라 제공 업체도 중요한 레이어입니다. 블록체인 앱을 만들려면 자체 노드를 운영해야 하지만, 이는 비용과 기술력이 필요합니다. 인퓨라나 알케미 같은 서비스는 노드 운영을 대신해줍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인터넷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로컬 노드 제공 업체의 역할이 더 중요합니다. 지연시간을 줄이고, 네트워크 단절 시에도 거래를 큐에 저장했다가 나중에 처리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이 외에도 KYC 인증 서비스, 스마트 계약 감사, 블록체인 데이터 분석, 스테이블코인 발행 인프라 같은 B2B 서비스들이 모두 크립토 생태계의 보이지 않는 레이어로 작동합니다.
크립토 기업들도 같은 전략을 쓸 수 있습니다. 소비자 앱을 만드는 대신, 기존 금융기관이나 통신사에게 블록체인 기반 인프라를 제공하는 방식입니다. 온체인 신용 기록 시스템, 국경 간 암호화폐 송금 API, USSD 연동 프로토콜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서비스는 소비자에게 직접 팔 수 없지만, B2B 시장에서는 분명한 가치를 갖습니다.
3. 신뢰 시스템의 재설계: 점수 없는 사회에서 신용 만들기
3.1 은행 계좌 없는 6억 명에게 신용점수는 무의미합니다
신용점수는 금융 이력이 있을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대출을 받고 갚은 기록, 신용카드 사용 내역, 연체 여부 같은 데이터가 쌓여야 점수가 계산됩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은행 계좌가 없는 사람이 6억 명이 넘습니다. 이들에게 신용점수를 부여할 방법이 없습니다. 기존 금융 시스템은 이들을 평가 불가능한 집단으로 분류합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농부는 매년 같은 시기에 씨앗을 사고, 수확 후 대금을 지불합니다. 소상공인은 매일 같은 도매상에서 물건을 사고, 며칠 후 외상값을 갚습니다. 이런 거래는 수년간 반복되지만, 은행 시스템에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현금으로 이뤄지거나, 비공식 장부에만 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데이터가 없는 게 아니라, 우리가 다른 종류의 데이터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은행 계좌 대신 휴대폰 충전 패턴을 본다면 어떨까요. 신용카드 사용 내역 대신 모바일 머니 송금 빈도를 본다면요. 연체 기록 대신 통신비 납부의 일관성을 본다면요. 이런 데이터는 이미 존재하고, 통신사와 모바일 머니 사업자가 갖고 있습니다.
일부 핀테크 기업들은 이 데이터를 금융 신용으로 전환하는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사용자가 매달 정확히 같은 날 휴대폰을 충전한다면, 수입이 안정적이라는 신호입니다. 같은 사람에게 반복적으로 소액을 송금한다면, 가족이나 사업 파트너와의 신뢰 관계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패턴들은 행동 기반 신용 평가의 기초가 됩니다.
3.2 통화 충전 패턴, 송금 빈도, 위치 데이터가 신용이 되는 순간
폰뱅크라는 기업은 아프리카 사용자들이 선불 통화 크레딧을 블록체인 자산으로 전환할 수 있게 합니다. 사용자는 신분증 없이도 서비스에 가입할 수 있습니다. 대신 휴대폰 사용 패턴이 신원 확인의 대리 지표가 됩니다. 얼마나 오래 같은 번호를 썼는가, 충전 빈도가 일정한가, 어떤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는가 같은 정보가 분석됩니다.
이런 데이터는 통신사가 이미 수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금융 서비스에 활용되지는 않았습니다. 통신사는 이 데이터를 마케팅 용도로만 쓰고, 금융기관은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폰뱅크 같은 중간 레이어가 생기면서, 통신 데이터와 금융 서비스가 연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코타니 페이는 USSD를 통해 블록체인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게 합니다. 사용자는 인터넷 없이도 암호화폐를 송금하고, 스마트 계약 기반 대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모든 거래 내역이 온체인에 기록됩니다. 대출을 받고 갚는 패턴, 송금 빈도, 거래 상대와의 관계 같은 정보가 블록체인에 남습니다. 이 데이터는 누구나 검증할 수 있고, 다른 금융 서비스에서도 참조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 신용 정보가 특정 기관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기존 신용점수는 신용평가사가 독점합니다. 다른 은행으로 옮기면 신용 이력을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합니다. 하지만 온체인 신용 기록은 사용자가 소유합니다. 어느 서비스를 쓰든, 같은 신용 이력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편의성의 문제가 아니라, 신용 시스템의 소유권 구조를 바꾸는 일입니다.
3.3 온체인 신용 기록의 진짜 가치: 국경을 넘는 검증 가능성
나이지리아에서 성실하게 대출을 갚아온 농부가 케냐로 이주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기존 시스템에서 그의 신용 이력은 나이지리아에 남습니다. 케냐에서는 다시 신용 없는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새로운 나라에서 대출을 받으려면 몇 년간 다시 이력을 쌓아야 합니다. 신용 정보가 국경 안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온체인 신용 기록은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블록체인에 기록된 신용 이력은 어느 나라에서든 조회할 수 있습니다. 나이지리아의 마이크로파이낸스 기관이 발행한 신용 기록을, 케냐의 대출 서비스가 검증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 검증이 중앙 기관 없이 이뤄진다는 점입니다. 각국의 신용평가사가 협정을 맺을 필요 없이, 블록체인 프로토콜만 있으면 됩니다.
글루와는 이 구조를 크레딧코인이라는 블록체인 위에 구축했습니다. 현지 금융 기관이 대출을 실행하면, 그 기록이 자동으로 크레딧코인에 업로드됩니다. 대출 금액, 상환 일정, 연체 여부 같은 정보가 암호화된 형태로 저장됩니다. 개인 정보는 직접 노출되지 않지만, 신용 패턴은 누구나 검증할 수 있습니다.
이 시스템의 진짜 가치는 투명성과 이동성입니다. 투자자는 어느 나라의 대출이든 실시간으로 상환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출 기관은 다른 나라의 신용 기록을 참조해 더 정확한 리스크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사용자는 자신의 신용 이력을 들고 어느 시장으로든 이동할 수 있습니다. 신용 시스템이 국가 단위가 아니라 개인 단위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3.4 행동 데이터를 금융 접근성으로 전환하는 기술 스택
행동 데이터를 신용으로 전환하는 과정은 기술적으로 복잡합니다. 단순히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어떤 데이터가 신용과 상관관계가 있는지 찾아내고, 패턴을 분석하고, 점수로 환산하는 알고리즘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머신러닝이 활용됩니다.
예를 들어, 통화 충전 패턴만 봐도 여러 신호를 읽을 수 있습니다. 매달 같은 날짜에 충전하는 사람은 정기적인 수입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충전 금액이 일정한 사람은 지출 관리가 되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충전 패턴이 불규칙하고, 소액을 자주 충전하는 사람은 현금 흐름이 불안정할 수 있습니다. 이런 패턴들을 학습한 모델이 신용 예측 점수를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위험도 있습니다. 데이터가 편향되어 있거나, 패턴 해석이 잘못되면 부정확한 신용 평가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 농촌 지역 사람들은 수확 시즌에만 대금을 받기 때문에 충전 패턴이 불규칙합니다. 이를 단순히 '불안정한 수입'으로 해석하면 잘못된 평가입니다. 알고리즘은 지역적 맥락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부 기업들은 현지 금융 기관과 협력해 모델을 조정합니다. 나이지리아의 농업 대출 기관은 수확 주기를 이해하고, 그에 맞춰 상환 일정을 설계합니다. 이런 도메인 지식이 알고리즘에 반영되면, 더 정확한 신용 평가가 가능합니다. 기술만으로는 부족하고, 현장 지식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결국 행동 데이터 기반 신용 시스템은 단순히 새로운 데이터 소스를 추가하는 게 아닙니다. 신용이라는 개념 자체를 재정의하는 작업입니다. 은행 이력이 아니라 경제 활동의 패턴을, 담보가 아니라 행동의 일관성을, 신분증이 아니라 디지털 발자국을 신뢰의 근거로 삼습니다. 이는 금융 포용의 새로운 경로를 여는 실험입니다.
4. 마지막 프로토콜 전쟁: 5년 후엔 늦습니다
4.1 표준이 고착되면 진입자는 룰에 종속됩니다
시장이 형성되는 초기에는 여러 방식이 경쟁합니다. 어떤 기술을 쓸지, 어떤 프로토콜로 연결할지, 어떤 데이터 구조를 쓸지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방식이 사실상의 표준이 됩니다. 그 순간부터 새로운 진입자는 그 표준에 맞춰야만 시장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플레이드가 그랬습니다. 2013년에 시작했을 때는 여러 경쟁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플레이드가 먼저 주요 은행들과 연결을 완료하고, 개발자들이 쉽게 쓸 수 있는 API를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미국 핀테크 생태계의 대부분이 플레이드의 인프라 위에서 작동합니다. 새로운 송금 앱을 만들고 싶다면, 플레이드의 프로토콜에 맞춰 개발해야 합니다. 직접 은행과 연결하려면 몇 년이 걸립니다.
아프리카는 지금 그 표준이 정해지는 시기에 있습니다. MFS 아프리카는 국가 간 결제 인터페이스를 구축하고 있고, 글루와는 온체인 신용 기록 시스템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들이 만드는 구조가 고착되면, 이후 진입자는 그 구조를 따라야 합니다. 새로운 방식을 제안할 수도 있지만, 이미 수십 개 파트너사가 연결된 시스템을 바꾸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크립토 기업들에게 지금은 시스템 설계에 참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5년 후에는 이미 인프라가 고착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기존 시스템에 통합되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규칙을 만들 수 있습니다. USSD와 블록체인을 어떻게 연결할지, 온체인 데이터를 어떤 포맷으로 저장할지, 국가 간 암호화폐 송금을 어떤 프로토콜로 처리할지를 정의할 수 있습니다.
4.2 플레이드가 미국 핀테크를 지배하는 방식이 여기서 반복됩니다
플레이드의 성공 방식은 단순합니다. 은행과 앱 사이의 연결을 가장 먼저, 가장 많이 구축했습니다. 개발자 입장에서는 플레이드 API 하나만 연결하면 수천 개 은행과 통신할 수 있으니, 굳이 다른 방법을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은행 입장에서도 플레이드를 통하면 수백 개 앱과 한 번에 연결되니, 개별 협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구조가 만들어지자 네트워크 효과가 작동했습니다. 더 많은 앱이 플레이드를 쓸수록, 더 많은 은행이 플레이드와 연결됩니다. 더 많은 은행이 연결될수록, 더 많은 앱이 플레이드를 씁니다. 선순환이 시작되면 경쟁사가 따라잡기 어렵습니다. 플레이드보다 기술이 좋아도, 네트워크 규모를 따라잡으려면 몇 배의 시간과 비용이 듭니다.
아프리카에서도 같은 패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MFS 아프리카는 이미 37개국, 500개 이상의 모바일 머니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송금 서비스를 만든다면, MFS 아프리카의 API를 쓰는 게 가장 빠릅니다. 직접 각국 통신사와 계약하려면 몇 년이 걸리고, 규제 승인도 따로 받아야 합니다. MFS 아프리카는 진입 장벽 그 자체가 됐습니다.
크립토 영역에서도 누군가 이런 위치를 차지할 것입니다. USSD와 블록체인 연결 프로토콜을 가장 먼저 표준화한 기업, 가장 많은 통신사 및 금융 기관과 통합을 완료한 기업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지금은 여러 기업이 실험하고 있지만, 5년 후에는 한두 개 기업만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 기업이 아프리카 크립토 인프라의 플레이드가 됩니다.
4.3 아프리카는 '잠재 시장'이 아니라 '새로운 룰의 테스트베드'입니다
많은 기업들이 아프리카를 '차세대 시장'으로 봅니다. 지금은 작지만 나중에 커질 시장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관점은 본질을 놓칩니다. 아프리카는 단순히 규모가 작은 시장이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룰로 작동하는 시장입니다. 그리고 이 룰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M-페사가 만든 모바일 머니 모델은 케냐에서 시작했지만, 이제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인도의 페이티엠, 중국의 알리페이, 동남아시아의 고젝 모두 비슷한 구조를 씁니다. 은행 계좌 없이 휴대폰으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은 이제 글로벌 표준이 됐습니다. 선진국에서 만들어진 모델이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만들어진 모델입니다.
크립토도 마찬가지입니다. USSD로 블록체인에 접근하는 방식, 행동 데이터로 신용을 평가하는 방식, 온체인에 신용 이력을 기록하는 방식은 모두 아프리카에서 먼저 실험되고 있습니다. 이 방식들이 성공하면, 다른 저자원 국가들도 따라할 것입니다. 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필리핀 같은 곳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프로토콜을 만드는 건 단순히 한 지역 시장을 확보하는 게 아닙니다. 글로벌 표준의 초안을 쓰는 작업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작동하는 프로토콜은 인터넷이 불안정하고, 스마트폰 보급률이 낮고, 은행 계좌가 희박한 모든 지역에서 작동할 것입니다. 이런 환경은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처한 조건입니다. 아프리카 프로토콜이 곧 개발도상국 프로토콜이 됩니다.
4.4 당신은 앱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규칙을 만들 것인가
크립토 기업들은 선택의 기로에 있습니다. 하나는 소비자 앱을 만드는 길입니다. 더 좋은 UI, 더 빠른 거래, 더 낮은 수수료를 내세워 사용자를 모으는 방식입니다. 이 길은 익숙하지만 경쟁이 치열합니다. 수백 개 크립토 월렛과 거래소가 이미 이 시장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인프라를 만드는 길입니다. 통신사와 블록체인을 연결하는 프로토콜, 온체인 신용 기록 표준, USSD 기반 지갑 API 같은 것을 만드는 방식입니다. 이 길은 느리고, 파트너 확보가 어렵고, 수익화 시점이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일단 구축되면 교체하기 거의 불가능한 구조가 됩니다.
앱은 경쟁하지만, 인프라는 독점합니다. 앱은 사용자가 쉽게 갈아타지만, 인프라는 파트너사가 쉽게 바꾸지 못합니다. 앱은 단기적으로 성장이 빠르지만, 인프라는 장기적으로 시장 전체의 수수료를 가져갑니다. 플레이드는 소비자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 핀테크 거래의 상당 부분에서 수수료를 받습니다.
아프리카 크립토 시장에서 누가 이길까요. 가장 많은 사용자를 모은 앱일까요, 아니면 가장 많은 파트너를 확보한 인프라 기업일까요. 역사는 후자를 지지합니다. 비자는 소비자 앱이 아니라 결제 네트워크입니다. 스위프트는 은행 앱이 아니라 송금 프로토콜입니다. 플레이드는 소비자 서비스가 아니라 금융 데이터 인터페이스입니다.
크립토 기업들이 아프리카에서 장기적으로 성공하려면, 규칙을 만드는 쪽에 서야 합니다. USSD 코드와 블록체인 주소를 어떻게 매핑할지, 온체인 신용 데이터를 어떤 스키마로 저장할지, 국가 간 암호화폐 송금을 어떤 API로 처리할지를 정의해야 합니다. 이런 정의가 표준이 되면, 그 위에 올라오는 모든 앱과 서비스는 그 표준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앱을 만드는 기업은 많지만, 규칙을 만드는 기업은 소수입니다. 그리고 그 소수가 시장을 지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