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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혁신의 4세대: 온체인 자산을 놓치면 생존할 수 없다

2025-12-18

[TL;DR]

  • 국내 금융 앱 사용자 중 15%가 온체인 자산 거래를 위해 타 플랫폼을 이용하며, 이는 연간 2천억 원 규모의 기회비용으로 전환되고 있다.
  • 전통 금융사가 느린 이유는 기술·조직·규제·비즈니스 모델이라는 네 가지 장벽이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며, 하나만 해결해서는 돌파할 수 없다.
  • 지갑 인프라를 빌리고, 규제는 협력으로 풀고, 조직은 작고 빠르게 움직이며, 신뢰는 투명함으로 쌓는 동시다발적 접근만이 생존 전략이다.

1. 당신의 사용자는 이미 다른 앱을 쓰고 있다

1.1 멀티호밍의 현실

국내 금융 앱 사용자 10명 중 3명은 두 개 이상의 거래 플랫폼을 동시에 사용합니다. 토스에서 주식을 사고, 업비트에서 암호화폐를 거래하고, 카카오페이 증권으로 해외주식을 매수합니다. 문제는 이 행동이 사용자의 선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의 앱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러 앱을 오가고 있습니다.

2024년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금융 앱 사용자가 타 플랫폼을 추가로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원하는 상품을 내 앱에서 제공하지 않아서"였습니다. 새로운 자산 클래스에 대한 접근성이 플랫폼 선택의 핵심 요인이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미국 대선 결과에 베팅하고 싶은데 내 앱에서는 안 되니까 폴리마켓을 깝니다. 솔라나 기반 밈코인을 사고 싶은데 내 거래소에 상장이 안 되어 있으니 팬텀 지갑을 만듭니다.

이 현상이 위험한 이유는 단순한 이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용자는 여전히 당신의 앱을 쓰고 있습니다. 여전히 로그인하고, 여전히 거래합니다. 하지만 지갑 점유율은 조용히 줄어듭니다. 처음엔 80:20이던 비중이 60:40이 되고, 어느새 역전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용자는 묻습니다. "굳이 이 앱을 계속 써야 하나?"

1.2 문제의 본질

멀티호밍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사용자가 여러 앱을 쓰는 건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진짜 문제는 메인 플랫폼의 자리를 빼앗기는 순간입니다. 금융 생활의 중심이 되는 앱, 가장 먼저 열어보는 앱, 자산의 대부분을 맡기는 앱. 그 자리를 내주면 회복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200만 명의 활성 사용자를 보유한 플랫폼을 가정해봅시다. 이 중 15%가 매달 한 번씩 다른 앱에서 온체인 자산을 거래한다고 치겠습니다. 암호화폐 거래소의 평균 수수료율을 고려하면, 1인당 월 평균 5만 원 정도의 수수료가 발생합니다.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연간 약 2천억 원입니다. 이건 손실이 아닙니다. 경쟁사의 수익입니다.

더 나쁜 시나리오는 따로 있습니다. 해외 플랫폼이 한국 시장에 본격 진출하는 경우입니다. 로빈후드가 한국어 서비스를 시작하고, 바이낸스가 원화 입출금을 지원하고, 코인베이스가 국내 라이선스를 따낸다면? 그들은 이미 퍼페츄얼 선물도, 예측시장도, 밈코인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용자 입장에서 선택은 명확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갑니다.

지금은 병행 사용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완전한 이동으로 바뀝니다. 그 전환이 일어나기 전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가 이 글의 핵심입니다.

2. 금융 혁신의 패턴: 역사는 반복된다

2.1 1세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1990년대)

1990년대 중반, 주식을 사려면 증권사에 전화를 걸어야 했습니다. 브로커와 통화하고, 주문을 구두로 전달하고, 거래 확인을 다시 받았습니다. 거래 한 번에 수수료는 10만 원에서 30만 원 사이였습니다. 영업시간에만 가능했고, 통화 연결이 안 되면 기회를 놓쳤습니다.

1997년, 미국에서 아메리트레이드는 온라인 거래를 8달러에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존 증권사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습니다. 메릴린치는 온라인 거래를 "도박꾼이나 하는 것"이라고 불렀습니다. 대면 상담을 통한 전문적 조언이야말로 증권업의 본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2000년이 되자 메릴린치는 시장 점유율을 급격히 잃었고, 결국 자체 온라인 플랫폼을 출시해야 했습니다.

한국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HTS가 등장했을 때 많은 증권사가 관망했습니다. 고객들이 복잡한 프로그램을 쓸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온라인 거래를 선점한 증권사들이 개인투자자 시장을 장악했고, 늦게 대응한 곳들은 합병되거나 사라졌습니다. 변화의 속도를 읽지 못한 지방 증권사들은 대부분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2.2 2세대: 유료에서 무료로 (2010년대)

2013년, 로빈후드는 수수료 없는 주식 거래 앱을 출시했습니다. 업계는 이를 지속 가능하지 않은 비즈니스 모델로 치부했습니다. 이트레이드, TD 아메리트레이드, 찰스 슈왑은 거래당 5~10달러의 수수료가 우월한 서비스와 안정성을 보장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수수료는 품질의 증거라는 논리였습니다.

6년이 흘렀습니다. 로빈후드는 1천만 사용자를 돌파했고, 젊은 세대의 첫 투자 플랫폼이 되었습니다. 2019년 10월, 주요 증권사들은 같은 날 수수료를 폐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게임은 끝나 있었습니다. TD 아메리트레이드는 찰스 슈왑에 인수되었고, 이트레이드는 모건스탠리로 넘어갔습니다. 6년은 충분히 긴 시간처럼 보이지만, 시장 점유율을 되찾기엔 턱없이 짧았습니다.

한국 시장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국내 증권사들은 미국보다 늦게 움직였지만 결국 수수료 경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수익 구조를 재설계할 시간이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수수료 수익에 의존하던 비즈니스 모델이 하루아침에 무너졌고,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곳들은 수익성 악화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2.3 3세대: 제한에서 개방으로 (2020년대 초)

2020년 이전, 개인이 엔젤 투자를 하려면 최소 2천만 원 이상의 자금과 까다로운 인증 요건을 충족해야 했습니다. 비상장 주식 거래는 소수 고액 자산가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전통적인 엔젤 네트워크와 사모펀드는 규제가 이 장벽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접근 제한이 시장의 질을 보호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엔젤리스트, 리퍼블릭, 칼시 같은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소액으로도 스타트업에 투자할 수 있게 되었고, 예측 시장이 합법화되면서 다양한 이벤트에 베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규제가 명확해지는 동안 기존 플레이어들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시장이 열렸을 때는 이미 신규 플랫폼이 인프라를 구축하고 사용자를 확보한 뒤였습니다.

한국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이 생겼고, 해외 주식 거래가 대중화되었고, 암호화폐 거래소가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전통 금융사들은 규제 불확실성을 이유로 관망했습니다. 그 사이 새로운 플랫폼들이 시장을 선점했습니다. 뒤늦게 시장에 진입한 금융사들은 후발주자의 불리함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습니다.

2.4 공통 패턴과 교훈

세 세대의 변화는 놀라울 만큼 비슷한 패턴을 따릅니다. 새로운 기술이나 비즈니스 모델이 등장하고, 기존 플레이어들은 지속 가능성을 의심합니다. 초기엔 틈새시장으로 치부되지만, 어느 순간 메인스트림이 됩니다. 후발주자들이 뒤늦게 따라하지만 격차는 좁혀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온라인 거래 시스템을 만드는 것만으론 부족했습니다. 사용자 신뢰를 쌓고, 규제 환경에 대응하고, 새로운 수익 모델을 설계해야 했습니다. 무료 거래를 시작하는 것만으론 부족했습니다. 대체 수익원을 확보하고, 사용자 경험을 재설계하고, 리스크 관리 체계를 갖춰야 했습니다.

승자와 패자를 가른 건 기술력이 아니었습니다. 변화를 감지하는 속도, 실험을 시작하는 타이밍, 실패를 감수하는 용기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네 번째 세대의 변화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온체인 자산의 시대입니다. 패턴은 반복될까요? 아니면 이번엔 다를까요?

3. 4세대 전환점: 온체인이 메인스트림으로 (2025~)

3.1 글로벌 시장의 폭발

2024년 미국 대선, 폴리마켓은 단일 이벤트에서 37억 달러의 거래량을 기록했습니다. 전통적인 여론조사보다 정확한 예측을 내놨다는 평가를 받았고, 주요 언론이 폴리마켓의 확률을 인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측 시장이 뉴스가 되었고, 수백만 명이 정치 이벤트에 직접 베팅했습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로빈후드는 2024년 예측 시장 서비스를 출시한 첫 해에 1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기존 주식 거래 사용자들이 자연스럽게 예측 시장으로 유입되었고, 젊은 세대는 전통적 자산보다 이벤트 베팅에 더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하이퍼리퀴드는 퍼페츄얼 선물 시장에서 매일 수십억 달러의 거래량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중앙화 거래소 없이도 레버리지 거래가 가능하다는 걸 증명했습니다.

크라켄은 밈코인 거래와 주식 토큰화 서비스를 동시에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직 이든은 NFT 마켓플레이스에서 출발해 크로스체인 토큰 거래 플랫폼으로 확장했습니다. 이 변화의 핵심은 속도입니다. 새로운 자산이 등장하면 몇 시간 내에 거래가 시작됩니다. 상장 심사도, 법무 검토도, 6개월짜리 통합 프로세스도 없습니다. 온체인에 존재하면 거래할 수 있습니다.

3.2 한국 시장의 역설

한국은 암호화폐 거래량 기준으로 전 세계 상위권입니다. 김치 프리미엄이라는 단어가 글로벌 트레이더들 사이에서 통용될 만큼 활발한 시장입니다. 젊은 세대는 주식보다 코인을 먼저 접하고, 밈코인 커뮤니티는 SNS에서 실시간으로 형성됩니다. 수요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금융사들의 대응은 가장 느립니다. 국내 증권사 중 암호화폐 거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그마저도 제한적인 종목만 다룹니다. 예측 시장은 아예 불법 영역으로 치부됩니다. 디파이 상품이나 토큰화된 자산을 다루는 전통 금융사는 전무합니다. 수요와 공급의 간극이 이렇게 큰 시장도 드뭅니다.

이 공백을 메우는 건 해외 플랫폼입니다. 한국 사용자들은 VPN을 쓰거나 해외 거래소 계정을 만들어 우회합니다. 바이낸스, 코인베이스, 비트겟 같은 플랫폼들은 한국어 지원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원화 입출금만 해결되면 국내 거래소와 경쟁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로빈후드는 아시아 진출을 공식화했고, 한국을 주요 타깃으로 언급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시간입니다. 해외 플랫폼이 한국에 들어오는 동안 국내 금융사들은 무엇을 준비할까요? 규제가 명확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사용자들은 이미 다른 곳에서 온체인 자산을 거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자리 잡은 플랫폼을 바꾸는 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3.3 숫자로 보는 기회비용

추상적인 위기감이 아니라 구체적인 숫자로 봅시다. 200만 활성 사용자를 보유한 금융 플랫폼을 가정하겠습니다. 이 중 15%가 매달 한 번 이상 타 플랫폼에서 온체인 자산을 거래한다고 칩시다. 보수적으로 잡아도 30만 명입니다.

암호화폐 거래소의 평균 거래 수수료는 0.1~0.2% 수준입니다. 사용자 한 명이 월 평균 500만 원을 거래한다고 가정하면, 거래소는 5천 원에서 1만 원 사이의 수수료를 받습니다. 여기에 출금 수수료, 스프레드, 프리미엄 서비스 수익을 더하면 1인당 월 5만 원 정도의 직접 수익이 발생합니다. 30만 명이면 월 150억 원, 연 1,800억 원입니다.

이건 직접 수익만 계산한 겁니다. 간접 손실은 더 큽니다. 사용자가 다른 플랫폼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 당신의 앱을 여는 빈도가 줄어듭니다. 광고 수익이 감소하고, 크로스셀 기회가 사라지고, 데이터 수집량이 줄어듭니다. 사용자 생애 가치가 하락합니다. 이 모든 걸 합치면 수천억 원 단위의 기회비용입니다.

더 중요한 건 방향성입니다. 이 15%는 늘어날까요, 줄어들까요? 온체인 자산에 대한 관심은 증가하고 있고, 접근성은 계속 개선되고 있고, 새로운 자산 클래스는 계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답은 명확합니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이 숫자는 30%, 50%로 늘어납니다. 그때는 손실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됩니다.

4. 왜 전통 금융사는 느린가?

4.1 기술 장벽

온체인 자산을 다루는 건 기존 금융 시스템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증권사의 백엔드는 중앙화된 데이터베이스 위에서 작동합니다. 거래 내역, 잔고, 정산은 모두 자체 시스템에서 관리됩니다. 하지만 블록체인은 분산 원장입니다. 거래는 네트워크 전체에 브로드캐스트되고, 컨펌은 외부 노드가 처리하고, 최종 확정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두 세계의 작동 방식이 애초에 다릅니다.

보안도 다른 접근이 필요합니다. 전통 금융사는 커스터디 모델에 익숙합니다. 고객 자산을 회사가 보관하고, 접근 권한을 중앙에서 관리합니다. 하지만 온체인에서는 프라이빗 키를 가진 사람이 자산을 소유합니다. 키를 잃어버리면 복구가 불가능하고, 키가 유출되면 자산이 즉시 탈취됩니다. 금융사 입장에선 이 모델 자체가 리스크입니다. 고객이 키를 잃어버렸을 때 누가 책임지나? 해킹 사고가 나면 보상은 어떻게 하나?

여기에 멀티체인 환경의 복잡도가 더해집니다. 이더리움만 있는 게 아닙니다. 솔라나, 베이스, 폴리곤, 아비트럼, 옵티미즘까지 주요 체인만 해도 수십 개입니다. 각 체인마다 지갑 구조가 다르고, 트랜잭션 포맷이 다르고, 가스비 계산 방식이 다릅니다. 한 자산을 추가하려면 해당 체인의 인프라를 통째로 연동해야 합니다. 개발팀 입장에선 새로운 자산 하나가 6개월짜리 프로젝트가 될 수 있습니다.

4.2 조직 장벽

기술 문제를 해결했다고 끝이 아닙니다. 의사결정 구조가 발목을 잡습니다. 대형 금융사에서 새로운 서비스를 출시하려면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상품기획팀이 제안서를 작성하고, 리스크관리팀이 검토하고, 법무팀이 규제 이슈를 점검하고, 컴플라이언스팀이 모니터링 방안을 설계하고, IT팀이 시스템 통합 일정을 산정하고, 경영진이 최종 승인합니다. 각 단계마다 회의가 열리고, 보고서가 오가고, 수정 요청이 들어옵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누구도 책임지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온체인 자산은 검증되지 않은 영역입니다. 성공하면 팀 전체의 성과지만, 실패하면 담당자 개인의 책임이 됩니다. 리스크 회피 문화는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입니다. "조금 더 지켜보자"는 말이 회의실에서 반복됩니다. 규제가 명확해지면, 시장이 검증되면, 경쟁사가 먼저 해보면 그때 움직여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부서 간 칸막이도 속도를 늦춥니다. IT부서는 기술 타당성을 검토하는데, 법무부서는 규제 리스크를 지적하고, 영업부서는 수익성을 따집니다. 각 부서가 자기 관점에서만 판단하고, 전체를 조율할 권한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크로스펑셔널 협업이 필요한데, 조직 구조는 사일로로 나뉘어 있습니다. 결국 가장 보수적인 의견이 채택됩니다. 누군가 "안 된다"고 말하면 프로젝트는 멈춥니다.

4.3 규제 장벽

기술과 조직 문제를 극복해도 규제가 남습니다. 한국에서 암호화폐 관련 서비스는 여전히 법적으로 불확실한 영역입니다. 특정금융정보법에 따라 VASP 신고는 필요하지만,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예측 시장은? 토큰화된 부동산은? 영구 선물은? 각각의 법적 지위가 다릅니다.

컴플라이언스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자금세탁방지를 위한 모니터링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고, 의심 거래를 실시간으로 탐지해야 하고, 온체인 주소와 실명을 연결해야 합니다. 체이널리시스나 TRM 랩스 같은 전문 업체의 솔루션을 도입하려면 연간 수억 원이 듭니다. 이 비용을 정당화하려면 충분한 거래량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서비스를 시작하기 전엔 거래량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입니다.

라이선스 취득도 시간이 걸립니다. VASP 등록만 해도 6개월에서 1년이 소요됩니다. 관련 법규가 계속 바뀌면서 요구사항도 변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준비해야 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 과정에서 금융사들은 "규제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지만 규제는 시장이 형성된 후에 따라옵니다. 시장이 없는데 규제가 먼저 정비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기회는 멀어집니다.

4.4 비즈니스 모델 장벽

마지막 장벽은 경제성입니다. 온체인 자산 서비스를 시작하려면 상당한 초기 투자가 필요합니다. 인프라 구축, 인력 채용, 마케팅, 컴플라이언스 시스템까지 합치면 수십억 원이 듭니다. 하지만 수익은 불확실합니다. 사용자가 얼마나 유입될지, 거래량이 얼마나 나올지, 수익성은 언제 확보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더 큰 고민은 기존 사업과의 충돌입니다. 암호화폐 거래 수수료는 전통 자산보다 낮습니다. 사용자들이 주식에서 코인으로 옮겨가면 거래 수수료 수익이 오히려 줄어들 수 있습니다. 신사업이 기존 사업을 잠식하는 구조입니다. 경영진 입장에선 당장 수익이 나는 사업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불확실한 미래보다 확실한 현재를 선택하는 게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단기 실적 압박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상장사는 분기마다 실적을 발표해야 하고, 주주들은 즉각적인 성과를 요구합니다. 온체인 자산 사업은 최소 2~3년은 투자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 기간 동안 비용만 발생하고 수익은 미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구조를 이사회에 설득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결국 "좀 더 지켜보고 판단하자"는 결론이 나옵니다.

네 가지 장벽은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기술 문제를 해결해도 조직이 움직이지 않고, 조직이 결정해도 규제가 막고, 규제를 통과해도 비즈니스 케이스가 약합니다. 하나만 해결해선 안 됩니다. 네 개를 동시에 풀어야 합니다. 이게 전통 금융사가 느린 진짜 이유입니다.

5. 해결책은 동시다발적이어야 한다

5.1 기술 인프라를 빌려라

온체인 인프라를 처음부터 직접 구축하는 건 비효율적입니다. 지갑 시스템을 만들고, 멀티체인을 지원하고, 보안을 검증하는 데만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립니다. 하지만 이미 검증된 솔루션들이 시장에 존재합니다. 수백 개 프로젝트에서 사용되고, 수백만 명의 사용자가 검증했고,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는 인프라입니다.

지갑 인프라 서비스가 대표적입니다. 지갑 생성부터 관리, 복구까지 전체 라이프사이클을 API로 제공하는 솔루션들이 있습니다. MPC나 TSS 기술을 활용해 프라이빗 키를 분산 저장하기 때문에 단일 장애점이 없습니다. 사용자가 키를 잃어버려도 복구할 수 있고, 멀티체인을 기본 지원하며, 가스비를 추상화해서 사용자는 블록체인을 의식하지 않아도 됩니다. 통합은 몇 주면 가능합니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합니다. 이런 서비스는 기술 레이어일 뿐입니다. 어떤 자산을 제공할지, 어떻게 수익을 낼지, 규제를 어떻게 대응할지는 여전히 금융사가 결정해야 합니다. 외부 서비스에 대한 의존성도 생깁니다. 장애가 나면 직접 대응할 수 없고, 커스터마이징에는 제약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만드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안전합니다.

규모가 커지면 기관급 커스터디 솔루션을 병행할 수 있습니다. 보험 커버리지를 제공하고, 규제 리포팅 기능이 내장되어 있으며, 감사 추적이 용이한 서비스들이 있습니다. 비용은 일반 지갑 서비스보다 높지만 대량의 자산을 다루거나 규제 요구사항이 엄격한 경우 필수적입니다. 처음엔 가벼운 지갑 서비스로 시작해서 거래량이 늘어나면 커스터디를 추가하는 방식이 현실적입니다.

유동성 접근도 중요합니다. 자체 유동성 풀을 구축하는 건 막대한 자본이 필요합니다. 대신 여러 탈중앙화 거래소의 유동성을 한 번에 접근할 수 있는 애그리게이터를 활용하면 됩니다. 크로스체인 브릿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검증된 인프라를 쓰면 체인 간 자산 이동을 간소화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컨트랙트 리스크는 남지만, 수십억 달러가 흐르는 프로토콜들입니다. 핵심은 차별화 지점을 올바르게 선택하는 겁니다. 지갑 기술이나 체인 인프라는 차별화 요소가 아닙니다. 사용자 경험, 자산 큐레이션, 컴플라이언스가 진짜 경쟁력입니다.

5.2 규제는 협력으로 풀어라

규제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접근 방식을 선택할 수는 있습니다. 가장 확실한 건 직접 라이선스를 취득하는 겁니다. 한국에서는 VASP 신고가 필요하고, 자금세탁방지 체계를 갖춰야 하며, 실명 계좌를 확보해야 합니다. 시간은 6개월에서 1년 정도 걸리고, 초기 비용도 상당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완전한 통제권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급하다면 파트너십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이미 라이선스를 보유한 업체와 협력하는 방식입니다. 암호화폐 거래소나 핀테크 업체가 인프라를 제공하고, 금융사는 사용자와 브랜드를 제공합니다. 출시 속도는 빠르지만 수익을 나눠야 하고, 통제권이 제한됩니다. 그럼에도 시장 반응을 빠르게 테스트하고 싶다면 유효한 선택입니다. 파트너십으로 시작해서 자체 라이선스를 병행 추진하는 전략도 가능합니다.

해외법인 활용도 옵션입니다. 싱가포르, 두바이, 스위스는 암호화폐 규제가 상대적으로 명확합니다. 해외에서 서비스를 시작하고, 한국은 나중에 진입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한국 사용자를 대상으로 하는 순간 국내법이 적용되기 때문에 완전한 우회는 불가능합니다. 글로벌 확장을 염두에 둔다면 고려할 만하지만, 국내 시장만 보면 실익이 크지 않습니다.

컴플라이언스는 자동화해야 합니다. 모든 거래를 수동으로 검토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온체인 거래 모니터링 솔루션들은 의심 거래를 실시간으로 탐지하고, 자금 출처를 추적하며, 제재 대상 주소를 차단합니다. 연간 비용은 수억 원이지만 이 투자 없이는 컴플라이언스 리스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거래량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필수입니다.

법무 자문도 지속적으로 필요합니다. 규제는 계속 변합니다. 미국 SEC의 판례가 나오고, 유럽에서 MiCA 규정이 시행되고, 한국에서 새로운 가이드라인이 발표됩니다. 전문 로펌과 협력해서 변화를 추적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규제를 회피하는 게 아니라 투명하게 대응하는 게 장기적으로 유리합니다. 사용자도, 규제 당국도 투명성을 평가합니다.

5.3 조직은 작고 빠르게

기술과 규제를 해결해도 조직이 움직이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전통적인 의사결정 구조로는 온체인 시장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별도의 태스크포스를 만들어야 합니다. 상품, 개발, 법무, 컴플라이언스, 사업 담당자가 한 팀에 모여 일해야 합니다. 기존 조직과 분리해서 운영하고, 명확한 목표를 주고, 자율성을 보장해야 합니다.

의사결정 라인도 단순해야 합니다. 최대 2단계면 충분합니다. 주간 단위로 빠르게 실행하고, 문제가 생기면 즉시 조정합니다. "시도 후 조정" 문화가 필요합니다.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게 아니라, 작게 시작해서 빠르게 배웁니다. 실패에 대한 면책도 일정 범위 내에서 보장되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아무도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습니다.

단계적 출시가 핵심입니다. 처음부터 전체 사용자를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선별된 1천 명에서 1만 명으로 시작합니다. 리스크가 낮은 자산부터 제공합니다. 스테이블코인이 좋은 출발점입니다. 가격 변동성이 낮고, 규제 리스크도 상대적으로 명확하며, 사용자들이 이해하기 쉽습니다. 베타 기간 동안 집중 모니터링하고,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고, 사용자 피드백을 반영합니다.

반응이 좋으면 점진적으로 확대합니다. 사용자 풀을 10만 명 수준으로 늘리고, 자산 종류를 추가하고, 컴플라이언스를 강화합니다. 6개월에서 1년 정도 지나면 전면 출시를 고려할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마케팅 캠페인을 시작하고, 추가 기능을 붙이고, 크로스체인이나 DeFi 같은 고급 기능으로 확장합니다. 대기업 프로세스로는 못 이깁니다. 스타트업처럼 움직여야 합니다.

5.4 신뢰는 투명함으로

기술, 규제, 조직을 정비해도 사용자가 신뢰하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온체인 자산은 아직 낯선 영역입니다. 사용자들은 익숙하지 않고, 리스크를 두려워하고, 사기 뉴스를 접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뢰를 쌓는 건 마케팅이 아니라 운영의 문제입니다.

교육이 먼저입니다. 온체인 자산이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무엇이 다른지 명확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단계별 온보딩을 설계합니다. 처음 사용자는 스테이블코인부터 시작하게 하고, 익숙해지면 메이저 토큰으로, 그 다음엔 알트코인이나 DeFi로 확장합니다. 인터랙티브 튜토리얼이나 시뮬레이션 기능도 도움이 됩니다. 실제 돈을 쓰기 전에 연습할 수 있게 해줍니다.

리스크 커뮤니케이션도 중요합니다. 가격 변동성, 스마트컨트랙트 리스크, 유동성 리스크를 명확하게 고지해야 합니다. "고수익" 같은 표현은 피하고, "변동성 자산"이라고 부릅니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사전에 보여줍니다. 사용자가 손실을 볼 수도 있다는 걸 투명하게 알립니다. 과장하지 않는 게 장기적으로 신뢰를 얻는 방법입니다.

보호 장치도 필요합니다. 초기에는 일일 또는 월간 거래 한도를 둡니다. 첫 거래 시 24시간 냉각 기간을 두는 것도 고려할 만합니다. 충동적인 결정을 방지합니다. 이상 거래 패턴이 감지되면 알림을 보냅니다. 가능하다면 제한적 범위에서라도 자산 보험을 제공합니다. 완전한 보호는 불가능하지만,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중요합니다.

커뮤니티 중심 접근도 효과적입니다. 얼리어답터 커뮤니티를 육성하고, 그들의 피드백을 빠르게 반영합니다. 정기적으로 AMA를 열어 사용자 질문에 답하고, 로드맵을 투명하게 공유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숨기지 않고 빠르게 공개하고 대응합니다. 사용자는 복잡함보다 불투명함을 더 싫어합니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인정하는 게 낫습니다. 신뢰는 완벽함이 아니라 정직함에서 나옵니다.

6. 선택의 시간

당장 모든 온체인 자산을 제공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선택권을 확보하는 겁니다. 시장이 언제 본격적으로 열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열렸을 때 대응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기술 인프라, 규제 대응, 조직 체계, 사용자 신뢰. 이 네 가지를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기회가 왔을 때 손 놓고 보게 됩니다.

두 가지 경로가 있습니다. 지금 움직이는 쪽과 기다리는 쪽입니다. 지금 움직이면 6개월 후 제한 베타를 시작할 수 있고, 1년 후엔 시장 반응에 따라 확대하거나 축소할 수 있습니다. 초기 투자와 불확실한 ROI라는 리스크가 있지만, 최소한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섭니다. 반면 기다리면 규제가 명확해질 때까지, 시장이 검증될 때까지, 경쟁사가 먼저 해볼 때까지 관망합니다. 안전해 보이지만 1년 후 뒤늦게 시작하면 경쟁사와의 격차는 메울 수 없습니다. 기술 격차 6개월, 라이선스 6개월, 사용자 신뢰 확보 6개월. 합치면 최소 1년 반입니다.

지금 움직인다고 반드시 성공하는 건 아닙니다. 시장이 예상보다 늦게 열릴 수도 있고,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다리면 실패가 확정됩니다. 온체인 자산 시장은 성장하고 있고, 사용자 수요는 존재하며, 해외 플랫폼은 한국 진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질문은 "할까 말까"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입니다. 당신의 회사는 어떤 선택을 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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